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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살아간다는 것 – 삶의 방식이 된 건축

by ina2143 2025. 4. 24.

자연과 하나되는 공간: 한옥의 시작은 마루에서

한옥의 구조는 단순히 건축기술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의 철학이 담긴 삶의 형태다. 그 중심에는 마루가 있다. 한옥에서 마루는 실내도, 실외도 아닌 독특한 공간이다. 땅에서 띄워 바람이 통하게 하고, 나무로 된 마루는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며 때로는 가족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 휴식 공간이 된다.

 

 

한국의 여름은 덥고 습하다. 하지만 전통 한옥의 마루는 그 자연환경에 가장 자연스럽게 대응한 결과물이다. 특히 마루 아래를 비워두는 ‘건축의 틈’은 공기의 흐름을 만들고, 그 바람은 실내로까지 스며든다. 이 마루는 물리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자연을 마주하는 ‘태도’에 더 가깝다. 사계절을 품고, 집 안에 있으면서도 집 밖을 바라보는 그 틈에서, 한국인의 공간철학이 시작된다.

 

마루는 또 하나의 사회적 기능도 지닌다. 마을 어르신들이 마루에 앉아 세상을 논하고, 손님이 오면 마루에 앉아 정담을 나누던 장면은 한옥이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서 공동체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지금의 아파트에는 없는 그 여유와 개방성은 마루가 주는 가장 고유한 감각이다.

 

바깥과 안의 경계, 툇마루에 서다

한옥의 또 하나의 특징은 ‘툇마루’다. 툇마루는 본채의 바깥 쪽을 따라 나 있는 좁은 마루로, 대청이나 방에서 바깥마당으로 바로 나가기 전 머무르는 공간이다. 툇마루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잠시 머무는’ 공간이며, 바깥과 안의 경계를 허물고 이어주는 매개다.

 

한국인은 오랫동안 이 툇마루에 앉아 해질 무렵을 보내고, 땀을 식혔으며, 아이들은 이곳에서 놀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처마 밑 툇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듯 툇마루는 자연과 소통하는 시선의 지점이었다.

 

툇마루는 또 전통적인 예절과도 밀접한 공간이다. 손님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 잠시 툇마루에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신발을 벗는 일련의 과정은 ‘집 안’과 ‘사회’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현대 건축에서는 쉽게 간과되는 이 중간 지점은,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동양적 공간 미학의 상징이다.

 

특히 툇마루에서 바라본 마당 풍경은 한옥 거주자의 시선을 자연에 둔다는 것을 말해준다. 높은 담장이나 벽 대신 낮은 기단과 개방된 구조는 사적인 삶과 자연환경이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전통이다.

 

뜨거운 바닥, 따뜻한 철학 – 온돌의 진화

온돌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난방 방식이다. 땔감을 태워 그 열기를 방바닥 전체에 전달하는 구조로, 단순히 따뜻한 바닥을 만든다는 기술을 넘어서 인간 중심의 공간 철학을 담고 있다. 온돌은 방에 앉고 눕는 문화를 만든 원동력이자, 한국인의 좌식 생활을 가능케 한 건축적 기반이었다.

 

방바닥에서 생활하는 문화는 곧 ‘수평적 시선’을 만들어낸다. 누군가를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대신, 함께 같은 눈높이로 앉아 대화를 나누는 관계의 평등성은 이 온돌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온돌이 주는 따뜻함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까지 포함하는, 감성적인 건축 기술이다.

 

과거의 온돌은 불을 때야만 따뜻해지는 구조였지만, 현대에는 전기온돌, 보일러 등으로 기술이 진화하면서도 ‘따뜻한 바닥’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특히 외국인들이 한옥 체험을 하며 가장 인상 깊게 꼽는 것이 바로 이 온돌이다.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는 독특한 경험이 그만큼 강렬한 문화적 차이로 다가오는 것이다.

 

온돌은 난방 기술을 넘어서 한국인의 주거 습관과 의식구조를 만들어낸 기반이었다. 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고, 책을 읽고, 잠을 자며 가족이 모이는 그 생활의 중심은 늘 온돌이었다.

 

대청마루에서 이어지는 안과 밖의 삶

한옥의 핵심 구조 가운데 또 하나의 중심은 ‘대청마루’다. 대청은 말 그대로 큰 마루, 즉 마루 중에서도 집 안의 중심부에 위치해 여러 방을 잇고 집 안 전체를 관통하는 공간이다. 여름철 무더위를 이기기 위한 통풍 구조로서의 기능은 물론, 가족 모두가 함께 머무는 공공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했다.

 

대청마루는 보통 문을 열면 바로 마당과 이어진다. 열린 구조 덕분에 실내외의 경계가 거의 없고, 때로는 집 밖 손님을 맞이하거나 잔치를 치르기도 한다. 바닥에 앉아 자연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개방감은 대청마루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또한 대청은 의례의 공간이기도 했다. 제사를 지낼 때 상을 차리거나, 가족이 함께 모여 절을 올리는 자리로도 사용되었으며, 이 공간에서 많은 의식과 풍속이 이루어졌다. 단순한 거실의 개념을 넘어, 삶의 리듬이 살아 숨 쉬던 공간인 것이다.

 

한옥의 구조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안방과 건넌방이 배치되는 형태가 많은데, 이 역시 가족의 유대와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공간 설계라 할 수 있다. 대청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집 안 전체를 울렸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공간은 다양한 용도로 채워졌다.

 

마무리하며: 한옥은 건축이 아니라 '삶'이었다

한옥은 단지 오래된 집이 아니다. 마루에서 바람을 느끼고, 툇마루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온돌 위에서 꿈을 꾸고, 대청마루에서 가족과 함께했던 그 모든 경험은 곧 ‘삶의 방식’이었다.

 

서양식 집이 실용성과 효율성을 앞세웠다면, 한옥은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 계절과의 조화를 우선으로 하는 ‘철학의 집’이었다. 한옥을 복원하고 현대에 맞춰 계승하는 일은 단순한 전통 보존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태도를 다시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기술이 발전하고 환경이 달라진 시대에도 한옥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연과 함께 숨 쉬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 구조적 사유는, 결국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