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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을 가다

by ina2143 2025. 4. 30.

 

경복궁 수문장

경복궁으로 향하는 길

아침부터 하늘이 청명했다. 비가 온 뒤여서인지 공기는 맑고 서늘했다. 오랜만에 여유가 생겨, 경복궁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단순한 궁궐 나들이가 아니었다. 평소에도 궁금했던 ‘수문장 교대식’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TV나 사진으로만 보았던 장면을 실제로 눈앞에서 마주하면 어떤 기분일까. 약간의 설렘을 품고 광화문역에서 내려 경복궁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화문 앞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외국인 관광객, 가족 단위 방문객, 교복을 입은 학생들, 그리고 나처럼 수문장 교대식을 보기 위해 일부러 온 듯한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띄는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옷을 입은 수문병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색채, 엄숙한 표정, 묵직한 걸음걸이. 전통과 시간이 만들어낸 독특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

10시가 가까워지자 광화문 앞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장정들이 북과 징을 준비하고, 수문병들이 제자리를 잡았다. "곧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흐르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첫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낮고 깊은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깃발을 든 기수들이 등장했다. 다홍색과 짙은 파란색의 전통 의상을 입은 병사들이 깃발을 높이 들고, 아주 느리지만 일정한 박자로 걸어 나왔다. 깃발에는 ‘守門將(수문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뒤이어 등장한 교대병들은 긴 창과 칼을 들고 있었다. 단지 무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위기는 경건해졌다. 수문장 교대식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600년 전 조선시대 실제로 시행되었던 궁궐 경비 절차를 복원한 행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이들은 과거의 군사였고, 이 장면은 진짜였던 것이다.

의식의 흐름 속으로

교대식은 의외로 세밀하고 복잡했다. 그냥 수문병 몇 명이 바뀌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매 순간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기존의 수문장과 신임 수문장이 맞절을 하고, 서로의 무기와 복장을 점검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아직 교대 완료가 아니다"는 듯 긴장감이 공간을 메웠다.

이 절차 속에는 조선이 지녔던 경계심과 질서의식이 담겨 있었다. 경복궁은 단순한 왕궁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중심지였다. 왕이 머물고, 신하들이 모이며, 외교사절이 드나들던 곳. 따라서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고, 수문장은 매 순간 자신의 책임을 확인받아야 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호위군사'들이 왕이 지나가는 길목을 수색하듯 움직이는 장면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검을 번쩍 들어 올리고, 땅바닥까지 세심하게 살피는 그들의 동작은 '의례'라기보다 '진짜 경계'처럼 느껴졌다. 물론 현대의 퍼포먼스지만, 그 진지함은 진짜였다.

사람과 전통 사이

주변을 둘러보니 다양한 반응이 보였다. 어린아이들은 화려한 복장에 탄성을 질렀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교대식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나처럼, 이 순간을 단순한 볼거리 이상으로 느끼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15세기 경복궁 앞, 똑같은 광화문 앞에서 똑같이 깃발이 나부끼고 북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장엄하게 행진하고, 백성들은 숨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맑은 하늘이었을까. 문득, 시간의 층위를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

교대 완료, 그리고 이어진 풍경

약 20여 분 동안 이어진 교대식은 새로운 수문장이 문 앞을 지키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수문병들은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누구 하나 미소를 짓거나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 엄격함이 오히려 관람객들의 태도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나는 행사장 한켠에 마련된 체험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서는 수문장 복장을 입어보거나, 직접 깃발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어린이들도, 외국인들도 모두 해맑은 얼굴로 체험을 즐겼다. 한편으로 생각했다. 과거의 전통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는 것이 경복궁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하고.

돌아오는 길, 남은 울림

행사를 다 보고 돌아오는 길, 광화문 앞을 다시 걸었다.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 배달 오토바이 소리, 관광객들의 웃음소리… 분명 현대의 풍경인데도, 머릿속에는 북소리와 깃발이 휘날리던 장면이 계속 맴돌았다.

수문장 교대식은 단순한 관광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규율과 질서, 그 안에 담긴 조선의 세계관을 짧게나마 체험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현대의 속도에 익숙한 우리가 잠시 걸음을 늦추고, 고요히 과거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경복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수문장들은, 광화문 앞에서 묵묵히 그 생명력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