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가 있는 날, 마을은 살아난다
내가 처음 오일장을 경험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외갓집이 있는 시골마을이었다.
평소엔 한적하기만 하던 마을 골목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트럭과 리어카, 작은 천막들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노란 두부를 써는 칼 소리, 방금 볶은 깨를 파는 아주머니의 구수한 사투리, 그리고 어깨를 부딪히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
그날 마을은 평소보다 훨씬 더 생기 있었다. 마치, 오일장이라는 마법의 주문이 마을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했다.
오일장은 ‘5일마다 한 번씩 서는 장(場)’이다.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처럼 끝자리가 3과 8인 날짜에 열리는 ‘3·8장’이 있는가 하면, 1과 6, 혹은 4와 9에 서는 장도 있다. 농경 사회였던 한국에서는 이런 오일장이 지역 경제와 교류의 중심이었다.
장날은 단순한 시장날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날을 기다렸고, 장날이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마을 어귀로 나섰다. 사러 가기도 하고 팔러 가기도 했지만, 사실 그날은 ‘만나는 날’이기도 했다.
오일장은 경제적 공간인 동시에, 사회적 광장이었다.
그곳에서 소문이 오가고, 연애가 시작되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생한 삶이 펼쳐지던 무대
오일장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새벽부터 짐을 싣고 먼 마을에서 달려온 장사꾼들, 흥정의 기술을 부리는 할머니, 아이 손을 꼭 붙잡고 꽈배기를 사는 엄마, 구수한 막걸리 한 사발에 친구와 지난 농사 얘기를 나누는 노인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상인 동시에 특별한 순간이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였다.
정육점 주인과 김장철마다 만나는 단골, 20년째 뻥튀기를 파는 아저씨와 “한 봉지 더 줘요”라며 웃는 아이.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계의 물물교환’이었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서로의 이름을 알고, 지난번 이야기의 연장선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
한 마디로, 오일장은 '안부가 오가는 시장'이었다.
또한 오일장은 지역의 식문화와 계절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도 했다.
봄이면 두릅과 냉이가, 여름이면 참외와 옥수수가, 가을이면 고추와 도라지가 좌판 위를 물들였다.
겨울에는 굴비, 묵, 곶감 같은 저장 식품들이 자리를 채웠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토종 재료들, 직접 만든 장, 정성스레 깎은 나무 농기구까지,
그곳은 마치 작고 고요한 박물관 같았다. 다만, 이 박물관의 전시품은 모두 팔린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사라져가는 장날의 풍경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장날이 기다려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마트가 생기고, 대형 온라인 쇼핑몰이 24시간 문을 열면서 장터는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갔다.
더 이상 오일장이 지역의 중심이 아니게 되었고, 사람들은 더 빠르고, 더 편한 소비를 택하게 되었다.
그러자 오일장은 점점 줄어들고, 남은 장터도 ‘관광용’으로만 남게 되었다.
장터에는 여전히 좌판이 펼쳐지고 있지만, 그 속도와 활기는 예전과 다르다.
젊은 장사꾼은 드물고,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대부분 노년층이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자리도 없었어요"라고 말하는 60대 상인의 말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장터는 지금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단지 경제 구조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느린 만남’과 ‘우연한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현대인의 삶 방식,
‘정이 오가는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사라진 사회가 오일장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오일장의 끝이 아니라,
우리 삶 속의 어떤 정서, 어떤 리듬, 어떤 감정의 종말일지도 모른다.
다시, 장날이 그리워질 때
나는 가끔 장터가 그립다.
삶이 너무 빠르게 돌아갈 때, 어딘가 따뜻한 시선과 느린 호흡이 필요할 때,
문득 오일장 생각이 난다.
언제든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주치던 그 공간.
값을 깎아도 웃으며 더 얹어주던 정,
비 오는 날에도 억새를 덮고 꾸역꾸역 자리 지키던 상인의 집념.
오일장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돈보다 말이 더 많았고, 계산보다 인사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정서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어떤 풍경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장터가 단지 오래된 유산이 아니라,
다시 불러내야 할 우리의 감각, 우리의 방식, 우리의 관계일 수 있다고.
어쩌면 우리는 다시 장날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그것이 주말 플리마켓의 형태든, 지역 소규모 마켓이든,
핸드메이드 장터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오일장 정신’을 담을 수 있다면
형태는 달라도 마음은 이어질 수 있다.
도시의 한복판, 푸드트럭과 수공예품이 어우러진 작은 장이 열린다면,
그건 과거의 오일장이 현대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거는 순간일지도 모른다.